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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믿지 않는 나라

Eric-Yang 2015. 6. 24. 09:49


과학을 믿지 않는 나라

글 | 최병묵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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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1일 메르스 감염자가 추가로 발견된 가운데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가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DB

쇠고기, 그중에서도 미국산 얘기가 나오면 저는 미국 여행할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미국 연수 중이던 2004년 일인데 아이들 여름방학을 맞아 서부 여행을 떠났습니다. LA를 거쳐 차를 몰고 북쪽인 시애틀로 향했죠. 왼쪽엔 태평양의 파도가 일렁이고, 오른쪽엔 구릉지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야트막한 산이 새까맣게 보였습니다. 궁금해서 차를 언덕배기에 세웠습니다. 자세히 보니 방목(放牧)하는 소였습니다. 숫자로 헤아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산 하나가 온통 소로 뒤덮여 있었으니까요. 조금 과장하자면 소와 하늘이 맞붙어 있는 ‘우평선(牛平線)’을 봤습니다. 시애틀로 향하는 동안 이런 장면은 흔했습니다. 제가 살던 중부 지역에서도 방목하는 소를 보곤 했는데 서부가 소를 더 많이 키우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기억을 안고 귀국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산 쇠고기를 국내에서 먹기 힘들 때였습니다. 그랬는데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이후 쇠고기 수입 개방이 쟁점이 됐죠. 2008년엔 광우병 파동이란 게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MBC 방송이 광우병 특집을 내면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MBC는 ‘다우너(주저앉는 소)’를 촬영한 영상을 마치 광우병에 걸려 죽어가는 소인 것처럼, 또 미국 여성 아레사 빈슨이 인간광우병(vCJD)으로 죽은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인터넷에선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머리에 금세라도 구멍이 나는 것처럼 ‘뇌 송송 구멍 탁’이란 말을 만들어내질 않나, “미국산 쇠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먹겠다”는 연예인까지 나왔습니다. 이 중 어느 것도 의학적·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광우병 파동은 정부 불신과 겹쳐 일파만파로 번져갔습니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당정 전면쇄신으로 돌파하면서 MBC와 소송전에 돌입합니다.
  
  
  과학적·경험적으로 근거 없는 광우병 소동
  
  광우병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라면 당시 보도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저처럼 미국에서 살며 쇠고기를 많이 먹었던 사람은 경험적으로 압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주변에 미국산 쇠고기를 권하는 편입니다. 한우도 맛있기는 한데, 맛있는 한우를 먹으려면 돈이 만만치 않게 들고, ‘값이 저렴한 한우’를 먹으면 맛이 영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도 제 권유를 받은 사람들 상당수가 선뜻 맞장구를 치지 않습니다. “찜찜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뭐가 찜찜한데요…”라고요. 그들은 딱히 반론을 내놓지 않습니다. “광우병… 근거가 없다고는 하지만 굳이…”라는 식으로 말을 흐립니다.
  
  반론을 할 수가 없겠지요. 찜찜한 근거를 댈 수 없거나, 있다고 쳐도 수년 전의 잘못된 선동에 기반한 것이니까요.
  
  인간이 광우병에 걸릴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실제 그런 사례들도 있고요. 그러나 한국인이 특별히 광우병에 취약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거나, 미국에 광우병 소가 유난히 많다는 것 등은 다 허위로 입증됐습니다. 단순히 몇몇 사람의 주장이 아닙니다. 현대 과학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객관적 사실로 확인한 것입니다.
  
  ‘국내에서 소를 키우는 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한우를 더 많이 먹어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어요’라거나 ‘내 입맛에는 신토불이(身土不二) 한우가 맞는 것 같아요. 난 역시 토종이에요’라는 식의 개인적 소신이라면 당연 존중해야죠. 형편과 선택의 문제니까요.
  
  
  원자력발전소 폐로도 과학적 과정 거쳤나?
  
  대한민국 원전의 시초인 고리 1호기가 폐로(廢爐)를 결정했습니다. 원전이 낡아서 위험하면 당연히 철거해야지요. 그런데 고리 1호기의 폐로 결정 과정은 정말 과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당초 “고리 1호기의 경제성과 안전성에 문제가 없고, 해외 원전의 경우 1~2차례의 가동기간 연장을 통해 60~80년까지 가동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17년까지라야 40년 된 것인데, 충분히 더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한수원 주장에 대해 일부 시민단체라는 곳과 지역 주민들은 고리 1호기의 경우 고장이 잦아 안전성에 문제가 많다며 즉각 폐쇄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원전 문외한(門外漢)인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다만 원전의 안전성은 시민운동을 하는 단체나 주민들이 검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분명히 압니다. 전문가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조사해 판단할 문제입니다. 이 부문 우리나라 제일의 전문가는 한수원입니다.
  
  문제는 그 한수원을 ‘원전마피아’들이 장악하고 있어 믿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불량부품 눈감아주고 돈 받아먹은 예가 어디 한두 번이었습니까. 한수원이 각종 비리로 제 발이 저리니 과학적 근거가 없는 요구를 덜컥 받아들인 것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이면에 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 일본 등 원전 선진국들은 안전성을 평가해 최고 60년간 운전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설계 수명이 다한 원전의 절반 정도를 안전 점검을 거쳐 현재 계속 운전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30년이 넘을 경우 통상적인 정기점검 외에 10년 주기로 별도의 안전성을 평가합니다. 이들 어느 곳에서도 시민운동 단체나 지역 주민들의 ‘비과학적’ 의지를 계속 운전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우리도 과학의 힘을 빌려 계속 운전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한수원은 믿을 수 있는 집단이 아니라 하니, 정말 믿을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정치적 입장에 휘둘리지 않고, 전문가적 양심에 따라 조사할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게 외국인이어도 좋습니다. 그래야 어디 가서든 제대로 설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의학적 근거 없이 휴교 결정한 학교들
  
  요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대처 과정에서 벌어진 일도 똑같습니다. 메르스가 처음 발병한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입니다. 백신도 치료약도 없긴 하지만, 3년 전에 발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실체를 파악한 상태입니다. ‘환자와 2m 안팎의 가까운 곳에서 접촉할 경우 감염 가능성이 높고, 감염되면 열이 오르고 기침이 자주 나는 등 심한 독감과 비슷하지만, 환자마다 증세가 달라 급작스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20년간 천식을 앓아온 77세 할머니가 이겨내는가 하면, 38세 젊은이가 위독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는 등 개인차가 심합니다. 일반 감기보다 약하게 겪고 지난 환자도 있습니다.
  
  의학 지식이 없긴 하지만, 메르스 자체가 무섭다기보다 환자 여건에 따라 무서울 수도, 가벼울 수도 있는 병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첫 발병 이후 열흘 정도가 지나자 서울 강남의 학교에 학부모들의 전화가 빗발칩니다. ‘왜 휴교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학교라면 “무슨 위험성이 있어 휴교를 해야 하지요”라고 반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상당수 학교가 이틀 정도 휴교를 결정하고, 몇 번 더 연장했습니다. 메르스 잠복기는 2~14일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설령 휴교의 필요성이 있다 하더라도 단지 이틀이 확산 방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실제 상황보다 조금 과잉대응을 한다 쳐도 학교가 쉴 만한 의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국과 중국·러시아의 차이
  
  외국의 경우를 보면, 과학을 믿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가 뚜렷이 갈립니다. 5월 초 서울에서 열린 과학기자대회에 43개국 450여 명이 모였습니다. 메르스로 참석을 취소한 사례는 대만·홍콩 출신 등 5명 정도라고 합니다. 5월 중순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의 주최 측도 한국인에 대해 오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러시아 보건당국도 한국 여행 자제령을 내렸습니다.
  
  반면 미국은 한국 방문 중 손을 씻는 등 통상적 주의를 요청했고, 미국 일부 언론은 서울이 한가해졌을 때 여행하라고 권고할 정도입니다.
  
  어쩜 똑같은 사안을 놓고 진단과 처방에 있어 이런 엄청난 차이를 보일까요. 저는 쉽게 말해 과학을 어느 정도나 믿느냐의 차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을 지향(指向)해야 할까요. 뒤집어 말하면, 과학을 저렇게도 믿어왔기에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이 됐고, 중국·러시아는 그런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